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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흑사병 원인, 증상, 사망자, 사라진 이유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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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중세 유럽에서 대 유행했던 전염병 흑사병의 원인과 발생과정, 그 이후의 발전 및 왜 유럽인들에게 더 치명적이었는가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흑사병 원인 증상 쥐 가설 사망자

흑사병은 14세기 유럽에서 7,500만~2억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류사상 최악의 전염병입니다. 흑사병의 병원균은 페스트균이라는 박테리아로, 감염된 설치류를 먹고 사는 벼룩에 의해 전염됩니다. 흑사병은 림프절, 폐, 혈액 등에 영향을 주며, 고통스럽고 부어 오른 림프선, 기침과 가래, 출혈, 괴저 등의 증상을 보입니다. 흑사병은 치료하지 않으면 대부분 사망에 이르며, 치사율은 30~90%에 달합니다. 흑사병은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평원지대에서 시작되어 비단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1343년경 크림반도에 닿아, 화물선에 들끓던 검은쥐에 기생하던 벼룩을 통하여 지중해 해운망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때 흑사병으로 유럽 총 인구의 30~60%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흑사병 이전의 세계 인구는 4억 5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4세기를 거치며 7,500만 명~2억명 정도의 인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흑사병으로 인해 줄어든 세계 인구는 17세기가 되어서야 이전 수준까지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흑사병의 정확한 발생원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다른 몇가지 가능성이 높은 가설이 있습니다.

  1. 흑사병은 원래 중앙아시아의 패스트라는 풍토병이었는데, 몽골 제국의 서방 진출로 인해 유럽에 전파되었다는 가설입니다. 1347년에 몽골군이 크림반도의 카파항을 공략하면서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의 시신을 성안으로 던졌고, 이를 통해 흑사병이 유럽에 확산되었다고 합니다.
  2. 흑사병은 원래 인도에서 기원하였고, 비단길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유럽에 전파되었다는 가설입니다. 이 가설은 유럽에서 발견된 흑사병 환자의 DNA가 인도의 페스트균과 가장 유사하다는 연구결과에 근거합니다.
  3. 흑사병은 원래 북아프리카에서 기원하였고,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동로마 제국의 흑사병 유행을 거쳐 중앙아시아와 유럽에 전파되었다는 가설입니다. 이 가설은 역사학자 마이클 W 돌스가 제기한 것으로, 동로마 제국의 흑사병 유행이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유행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흑사병에는 증상에 따라 패혈성 흑사병, 폐 흑사병, 림프절 흑사병의 세 종류가 있습니다. 림프절 흑사병은 원인균이 목, 겨드랑이, 사타구니 등에 있는 림프절을 공격하여 부종을 일으키며, 초기 증상은 38 - 41 °C의 고열과 함께 구토, 두통을 보여 말라리아로 오인되기도 합니다. 증상이 진행됨에 따라 흑사병 특유의 검은 반점, 부종이 나타납니다.

흑사병 진행 이후에 흑사병은 유럽의 종교사, 사회사, 경제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럽인들은 흑사병이 왜 생기는지를 모르고, 하늘이 내린 심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고행과 참회를 하고, 일부 사람들은 쾌락과 낭비를 즐겼습니다. 거지, 유대인, 한센병 환자, 외국인 등이 흑사병을 몰고 다니는 자들로 몰려서 집단 폭력이나 학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흑사병으로 인해 인력이 부족해지면서 농민들의 지위가 상승하고, 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르고, 도시화와 상업화가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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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은 왜 유럽인들에게 더 치명적이었을까?

  1. 유럽의 기후가 흑사병의 확산에 유리했습니다. 14세기 초 유럽의 기후는 중세온난기가 끝나고 연 평균 기온이 하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겨울 추위는 매서워지고 여름 기후도 좋지 않아 1315년에서 1317년 사이에 대 기근이 발생하였고 특히 북유럽의 피해가 심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흑사병에 의한 피해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2. 유럽의 도시가 위생 상태가 나빴습니다. 당시 유럽의 도시는 인구가 급증하면서 쓰레기와 배설물, 동물의 시체 등이 도로에 쌓여있었습니다. 쥐와 벼룩이 번식하기 쉬운 환경이 되어 흑사병의 전파를 촉진했습니다. 또한 도시 주민들은 영양 부족과 위생 부족으로 면역력이 약해져서 흑사병에 쉽게 감염되었습니다.
  3. 유럽의 의학이 흑사병을 잘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유럽의 의학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에 따라 체액 이론을 주로 따랐습니다. 체액 이론은 인간의 몸에는 혈액, 점액, 황담, 검담이라는 네 가지 체액이 있으며, 이들의 균형이 깨지면 병이 생긴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흑사병 환자들에게는 혈액을 뽑거나, 구토나 설사를 유발하는 약을 주거나, 림프절을 찔러서 부종을 줄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치료법은 오히려 세균의 확산을 촉진하거나 환자의 면역력을 약화시켰습니다. 반면 아시아에서는 흑사병에 대한 경험이 더 오래되어 있었고, 한의학이나 아유르베다 등의 전통 의학을 통해 적절한 처방을 할 수 있었습니다.
  4. 유럽의 사회가 흑사병에 대한 공포와 불신으로 인해 혼란과 분열을 겪었습니다. 흑사병이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고행과 자기혐오를 하거나, 다른 종교나 민족에 대한 증오와 학살을 벌였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은 흑사병을 유포하는 자들로 몰려서 많은 진형과 학살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사태는 사회적 안전망과 연대감을 약화시키고, 병원체를 더욱 확산시켰습니다. 반면 아시아에서는 흑사병에 대한 종교적 해석이 다양했고, 사회적 분열보다는 협력과 조화를 추구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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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은 왜 사라졌을까? 흑사병이 사라진 이유 가설

흑사병이 사라진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몇 가지 가능성 있는 가설이 있습니다.

  1. 흑사병에 대한 면역력이 증가했습니다. 흑사병에 감염되어 살아남은 사람들은 페스트균에 대한 항체를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항체는 자손들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따라서 흑사병에 대한 저항력이 세대를 거듭할수록 높아졌습니다.
  2. 쥐와 벼룩의 수가 감소했습니다. 흑사병의 주요 전파 매개체인 쥐와 벼룩은 인간의 생활환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럽의 도시는 위생 상태가 나빠서 쥐와 벼룩이 번식하기 쉬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흑사병 이후에는 도시의 인구가 감소하고, 위생 개선과 쥐잡이 등의 조치가 이루어져서 쥐와 벼룩의 수가 줄어들었습니다. 또한 갈색쥐가 검은쥐를 구축하면서 페스트균에 덜 민감한 종이 주류를 차지하였습니다.
  3. 의학과 위생이 발전했습니다. 흑사병은 유럽의 의학과 과학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연구와 발견이 이루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17세기에는 미생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톤 반 레우엔훅이 현미경을 개발하고, 세균을 관찰하였습니다. 19세기에는 로베르트 코흐가 페스트균을 분리하고, 알렉산더 영셀만이 페스트 백신을 개발하였습니다. 또한 유럽에서는 위생법과 공중보건제도가 도입되어 전염병의 예방과 치료가 가능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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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르시니 페스티스와 페스트균

예르시니아 페스티스와 페스트균은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는 페스트균의 과학적 명칭이고, 페스트균은 일반적인 명칭입니다.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는 예르시니아라는 세균 속에 속하는 종입니다. 예르시니아 속에는 다른 종들도 있으며, 그 중 일부는 인간에게 감염되어 다른 질병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르시니아 엔테로콜리티카 (Y. enterocolitica)는 장염을 일으키는 세균이고, 또다른 예르시니아 (Y. pseudotuberculosis)는 림프절염을 일으키는 세균입니다.

이상 중세시대를 휩쓸었던 최악의 전염병 흑사병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